홍성의 홍주성역사관, 과거부터 미래 역사까지 담다

홍상수 기자 | 기사입력 2020/07/17 [00:53]

홍성의 홍주성역사관, 과거부터 미래 역사까지 담다

홍상수 기자 | 입력 : 2020/07/17 [00:53]

 

 

충남도 홍성군 홍주성(사적 231호)에 위치한 홍주성역사관(洪州城歷史館)은 2011년 5월 5일에 개관해 올해 9년째를 맞았다. 역사관은 홍성의 대표적인 관광자원이며, 홍성의 역사를 발굴하고 국민에게 알리는 공간이다.

 

홍성의 옛 이름은 고려 초 ‘운주’로 시작해, 2018년 큰 고을 이라는 ‘홍주’로 사용했다. 뿌리 깊은 나무와 같이 유서 깊은 홍성의 역사와 문화를 알 수 있는 곳이다.

 

홍주성역사관 전시홀에는 1871년 규장각 지도를 참고해 만든 홍주성복원모형도가 눈길을 끈다.

 

 

홍성에 살아간 조상의 흔적들


홍성의 선사시대는 옥암리에서 구석기 시대의 유물이 출토됐다. 상정리, 송월리, 학계리에서 신석기 시대 유물과 주거지가 발굴됐고, 남장리, 장척리, 상정리에서 청동기 유물과 주거지가 확인됐다. 충남도청 이전 지역에서 철기시대 수혈유구와 유물이 발굴돼 구석기 시대부터 홍성에 사람이 살았음을 알 수 있다.

 


홍성의 세거성씨(世居姓氏)는 구항 연산서씨, 담양전씨, 양주조씨 등으로 지금도 구항면 내현리 집성촌이 있다. 석천한유도 등 유물도 남아있다.

 

                     <석천한유도> 조선후기 도화서 김희겸 작품 (충남도 유형문화재 제127호) 전택수 기탁

 

아래 사진은 남당 한원진 유물이다.

 

 

홍주의병 관련 유물 등 총 170~180여점이 전시돼 있다.

 

 

홍성의 대표 유학자, 남당 한원진


홍주목에는 정3품 목사(牧師)가 임명됐다. 1894년 갑오개혁 이전까지 대표적인 인물로 지봉 이수광, 윤행교, 김홍욱, 이안눌 등이 있다. 1895년 홍주부로 개편돼 홍주부 관찰사가 임명돼 충남도 22개군을 관할했다.
 
임진왜란이 진행 중인 1586년 왕실 서자인 이몽학이 홍산에서 난을 일으키자, 홍주목사(牧師) 홍가신(洪可臣)은 백성들을 안심시키고 인근지역 관군과 연합하여 반란군을 막아 위기의 조선을 지켜냈다.


남당 한원진은 조선후기 대표적인 기호유학자이다. 한원진의 인물성 이론은 문인들을 통해 19세기 후반 내포지역의 주요한 학풍으로 자리 잡았다.

 

                                                남당 한원진 초상 (충남 유형문화재 제237호)

 

이는 내포지역에 남당학파를 형성하는 기반을 만들어 홍주문화권의 한 축을 형성했다.

 

한말에는 남당학파에 속한 내포지역 유림들이 '홍주의병'을 주도했다. 한원진은 1725년 경연관이 돼 영조의 신임을 얻었으나 소론을 배척하다 탕평책에 어긋난다 하여 사직됐다. 이후 1741년 구명운동으로 복직, 사헌부 장령과 집의에 임명됐으나 사퇴하고 학문연구와 저술에만 몰두했다.

 

천주교의 성지, 홍주


홍주는 바다와 인접하여 외부의 문물 수용의 창구역할을 해 천주교를 받아들이는 시기와 전파속도가 빨라 천주교 신도가 전국에서 가장 많았다. 1792년 홍주옥에서 얼려 죽인 원시장을 시작으로 홍주목에서 우리나라에서 두 번째로 많은 천주교인 212명이 순교하여 ‘신앙의 묏자리’라는 별칭을 얻었다.

 

 

2014년 프란치스코 교황이 주례한 시복미사에 홍주목에서 순교한 원시장 베드로, 방 프란치스코, 박취득 라우렌시오, 황일광 시몬이 시복됐다.

 

시복이란 순교한 이에게 복자 칭호를 허가하는 교황의 공식 선언이다. 시복은 로마 교황청의 엄격한 심사를 거쳐 결정된다.

 

        1925년 시복식기념을 위해  프랑스에서 발행한 신문으로 조선에서 천주교박해삽화가 들어간 신문이다.

 

홍성을 중심한 동학세력의 내포지역은 서산과 태안에서 1984년 10월 1일 첫 기포하였다. 10월 24일에는 당진의 성전곡과 신례원 전투에서 승리한 후 홍주성을 공격하여 10월 28일부터 29일까지 전개됐으나, 홍주성 전투는 많은 희생자만 생긴채 패퇴했다. 이후 일본군, 관군, 유회군의 대대적인 토벌에 의해 희생됐고 내포지역의 동학혁명은 막을 내렸다.

 

홍주의병은 남당학파의 전통이 강한 홍성지역의 특성이 반영 돼 일어난 의병이다. 1차 홍주의병(1896)은 지산 김복한, 복암 이설을 중심으로 명성황후 시해와 단발령에 반해 일어났다. 2차 홍주의병(1906)은 을사늑약의 부당성을 주장하며 민종식을 중심으로 일어났다.

 

의병이 봉기하여 홍주성을 점령하였으나 일본군의 반격으로 의병 수백명이 사망했고, 홍주성 10리가 초토화됐다. 남당 한원진 기호학파의 대의정신을 이어받은 수백명의 많은 의병과 이외에도 충청도 지역에 화서학파를 계승한 곽한일, 이세영 등이 의병전에 참여해 대의를 위해 목숨을 바쳤다.

 

1910년 일본에 의해 홍성은 홍주와 결성을 합쳐 홍성군으로 개편됐다. 1919년 3.1독립운동이 시작되자, 만해 한용운은 민족대표 33인으로 앞장섰고, 백야 김좌진 장군은 독립을 위해 일제에 저항하는 독립운동가를 배출했다.

 

홍주면과 광천면이 각각 1941년과 1942년에 홍성읍.광천읍으로 승격돼, 2개읍 9개면으로 편성돼 현재에 이렀다.

 

홍성군은 시 승격을 목표로 고려왕조 때부터 내려온 홍주 지명을 회복하려 노력했고 그 일환으로 충남도청이 2013년 1월에 홍북면에 위치한 내포신도시로 이전했다. 환황해권을 선도하게 될 2020년대 홍성의 도약을 기대한다.